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뮤 전쟁 (문단 편집) == 전개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Y1wA0PKeJqc)]}}}||{{{#!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BXpu6tbFCsI)]}}}|| ||<:> {{{-1 당시 작전 기록 영상.[br]에뮤들을 '적(enemy)'이라 지칭하는 것이 특징이다.}}} ||<:> {{{-1 에뮤 전쟁 포토그래피 영상(한국어 자막 지원)}}} || 1932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얼마 되지 않은 [[호주]]에는 딱히 배운 기술이 없는 퇴역군인 다수가 농부로 삶을 꾸렸다. 문제는 서부 지역의 벌판에 농경지를 넓히기 시작하면서 토착조류 [[에뮤]]와의 갈등이 생겼다는 점이었다. 농부들이 작은 야생동물을 막기 위해 울타리를 둘렀지만, 에뮤 무리들은 그런 울타리 '''따위'''는 거대한 몸뚱이로 들이받아 가뿐히 부수고 들어와 농경지를 휩쓸었다. 특히나 그 해 9월은 기록적인 가뭄이 들었기에 에뮤 군단[* 실제로 당시 신문에서는 에뮤 군단이라고 기술하였다. 그리고 당시 에뮤와 맞서 싸운 농부들과 군인들은 '''이 표현이 웃기거나 유머러스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먹이 부족에 시달려 농경지에 지속적으로 침입해서 밀밭을 헤집어놓았다. 이런 녀석들이 한두 마리였다면 밭을 망가뜨리는 [[멧돼지]] 수준이었겠지만, 문제는 에뮤 군단의 수가 '''2만 마리'''가 넘는다는 것이다. 농부들은 거대한 에뮤 군단을 목도하고 처음에는 관공서에 전화해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미 에뮤의 수는 지방 관공서가 해결하지 못할 정도로 많았다. 1차 대전 참전 경력이 있던 농부들이 기관총은 사람을 잘 잡으니까 에뮤도 잘 잡으리라 생각해서 군 파병을 요청했고, 그리하여 당시 호주 국방장관 조지 피어스(George Pearce 1870-1952)가 대민봉사와 훈련을 겸하는 작전으로 [[루이스 경기관총]] 2정과 탄약 1만여 발을 지참한 병력을 파병하도록 허가했다. 이에 왕립호주포병대(Royal Australian Artillery)의 제7중포병연대(7th Heavy Artillery)에 소속된 귀네드 퍼브스 윈-오브리 메리디스(Gwynydd Purves Wynne-Aubrey Meredith) 소령의 지휘 하에 맥머레이(S. McMurray) 하사와 기관총 사수 오할로란(J. O'Halloran)이 파견되었다. 부대는 10월 말 출정했으나 10월 31일 갑작스런 폭우가 쏟아져 일정을 미루었고, 1932년 11월 2일부터 11월 9일까지 약 일주일 동안 [[호주]] 서부를 돌아다니며 에뮤와 인간 사이의 대전쟁을 시작하였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548852636.jpg|width=100%]]}}}|| >…each pack seems to have its own leader now—a big black-plumed bird which stands fully six feet high and keeps watch while his mates carry out their work of destruction and warns them of our approach. >에뮤 무리에 우두머리가 생긴 것으로 보입니다. 검은 깃털이 달린 1.8미터 크기의 큰 새가 동료들이 전투를 벌이는 동안 망을 보며 우리의 접근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 >작전 4일차 보고 중 요즘에야 새 때문에 전쟁을 선포한다는 게 웃긴 일이지만, 당시에는 가뭄 때문에 식량난이 심각했기에 신문 1면에 에뮤와의 전쟁이 대서특필될 만한 사건이었다. 영연방 문화 특유의 블랙 유머로 '에뮤 대전쟁(Great Emu War)'이라는 명칭을 붙였을 수도 있다.[* 사실 호주는 현대에도 동물원 코끼리가 탈주한 얘기가 일간지 1면에 실릴 정도로 동물과 연관된 사건이 자주 벌어진다.] 처음에는 기관총이 있으니까 큼지막한 새 만 마리 따위야 바람 앞의 깃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에뮤는 달리는 속도가 워낙 빨라서 야지에서는 군용 트럭으로도 쫓아가기 힘든 데다가 맷집도 생각보다 튼튼해서 쉽게 죽지 않았기 때문에 군대가 오히려 고전했다. 그도 그럴 게 기관총을 사람끼리 전쟁하듯 원거리에서 사격해보니 시속 60km에 달하는 속도로 달리는 에뮤를 맞추는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물론 에뮤도 동물이다보니 머리나 다리에 총알을 맞으면 죽긴 하지만 사람보다 작은 에뮤의 머리와 빠르게 뜀박질하는 다리를 멀리서 저격총도 아니고 기관총으로 맞추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또한 기관총 소리에 놀라 떼거지로 도망치는 바람에 기관총의 장점인 연사력을 제대로 살릴 수 없었다. 호주군은 방법을 바꾸어 트럭에 루이스 경기관총을 설치한 [[테크니컬]]을 만들어 기동사격으로 에뮤들을 섬멸하기로 했다. 당시 기준으로 강력한 무기였던 루이스 경기관총으로 무장한 [[기갑]]장비를 대동한 호주군은 에뮤 군단을 상대로 처음엔 무서울 것이 없었...지만 전쟁은 항상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기 마련. 기세 좋게 루이스 경기관총을 설치한 트럭은 출격한지 얼마 되지 않아 어떤 용맹한 에뮤 한 마리의 육탄돌격에 파괴되고 만다. 사실 단순히 핸들이 고장난 정도긴 했지만. 상황은 더욱 심각해져 에뮤 군단은 [[게릴라]] 작전을 펼치며 호주군을 농락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에뮤 군단이 소규모로 갈라져 곳곳의 농작물을 먹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무리 중 가장 키가 큰 에뮤가 지휘관 역할을 하여 호주군을 감시하고 경계했고[* 이는 무리생활을 하는 조류들의 전형적인 특징인데, 기러기나 닭, 친척인 타조도 이렇게 보초를 서는 리더격이 되는 놈이 있다.] 에뮤 한 무리가 인간에게 공격을 받으면 다른 무리가 다른 곳의 활짝 열린 밀밭을 유린하여 농작물을 뜯어먹었다. 이런 과정이 지겹게 반복되자 호주군은 전의를 상실했다. 호주군은 지원받은 탄약 1만 발을 거의 다 썼으나, 약 수십에서 수백여마리의 에뮤만을 소탕하였다. 당시 동물권 단체 또한 이 전쟁에 지속적으로 반대 입장을 밝히고 있었으며 결국 11월 8일 의회가 전쟁의 지속에 대해 난색을 표하였고 다음 날인 11월 9일 작전이 중단되었다. 당시 지휘관은 전차보다도 상대하기 힘든 적이라고 실토했다. 이후 호주 농부들의 지원 요청을 받은 국방부가 12일 병력을 증원하여 작전을 재개했고, 호주 서부에서 한 달간 약 500마리의 에뮤가 사살되었다. 12월 10일, 지휘관 메리디스가 마지막으로 철수하면서 에뮤 전쟁은 끝났다. 그는 "에뮤 986여 마리를 사살했고 수천 마리가 부상을 입었으며 곧 죽었을 것"이라 주장했지만, 이 내용은 엄밀히 검증되지는 않았다. 다만 호주 정부는 그 뒤로 다시는 에뮤 소탕을 위해 군대를 보내지 않았고, 사건 이후 농부들의 지원 요청은 거절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